트림원 바이크컴퓨터 사용기

기대

약 1년 전에 킥스타터에 '트림원'이라는 바이크컴퓨터 백킹이 올라왔습니다. 그때까지도 바이크컴퓨터는 대강 가민 엣지 시리즈가 가장 많이 사용됐습니다. 새롭게 나타난 와후 엘리먼트가 그나마 괜찮아 보였고 브라이튼을 비롯한 군소 장치들은 저걸 도대체 왜 돈 내고 구입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적은 사용자 수와 신뢰성 없는 동작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고 가민 엣지 시리즈가 훌륭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이크컴퓨터 시장에 거의 처음부터 있던 덕분에 오랜 기간에 걸쳐 적당한 수준의 기능과 신뢰성을 확보한 정도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배터리시간, 코스 내비게이션, 외부장치 연결 기능은 형편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배터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주제는 가민 엣지 바이크컴퓨터에 비해 스마트폰이 압도적으로 더 잘 했고 그렇게 몇 년 지나자 바닥에 떨어져 깨인 눈물젖은 $1000 짜리 스마트폰과 멍청한 가민 엣지 사이에 비집을 만한 기회가 생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 트림원 바이크컴퓨터가 나타났습니다.

가민 엣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배터리시간 평가는 딱 두 가지입니다. 가민 배터리가 한번도 부족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항상' 배터리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제 경우는 후자였고 이유는 한번에 12시간 이상 라이딩할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USB포트가 둘 달린 외장배터리는 장거리라이딩에 항상 전조등과 바이크컴퓨터를 항상 충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장거리 라이딩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가민 엣지는 스펙 상으로는 15시간 정도 동작한다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코스 내비게이션 기능 사용, 낮은 기온에 노출, 여러 센서에 연결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10시간도 채 안되는 시점에 배터리 부족 경고가 나타나곤 합니다. 자전거 핸들은 항상 USB케이블이 너덜너덜 감겨있었고 낙차라도 한번 했다가는 이 모든 장비가 한번에 바닥에 내팽개쳐질 수 있었습니다. 불만이 슬슬 커질 무렵 킥스타터에 나타난 트림원의 컨셉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스마트폰은 더 강력한 CPU와 거대한 배터리가 달려있습니다. 기압계와 나침반, GPS센서도 달려있고요. 이 장치는 장거리 라이딩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만 단 하나, 그 비싼 가격에 비해 부서지기 쉬웠습니다. 자전거 핸들은 생각보다 각박한 환경이었고 굳이 낙차하지 않더라도 강한 진동이 몇 백 킬로미터 동안 유지되면 멀쩡한 유리에도 금이 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바이크컴퓨터를 앞에 달고 스마트폰은 저지 뒷주머니나 파우치에 넣고 있어도 바이크컴퓨터가 스마트폰의 자원을 끌어다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는 훌륭해 보였습니다. GPS도 갖다 쓰고 고도계도 나침반도. 거기에 파워미터나 케이던스센서도 끌어다 쓴다면 자전거 앞에 달린 바이크컴퓨터는 거의 모니터 역할만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배터리를 절약하면 저는 스마트폰 배터리만 신경쓰면 됐고 모니터를 켜지 않는 이상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그렇게 훨씬 오랜시간 배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림원의 컨셉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최대 100시간 이상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신빙성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30만원 가까운 금액을 내고 백킹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시즌온 할 즈음이 됐지만 '예상대로' 기기 배송은 딜레이됐습니다. 저는 여전히 익숙한 가민 엣지를 들고 시즌을 시작했고 여전히 달리는 내내 충전 케이블이 핸들에 감겨 있었고 비슷한 가격대의 가민 신제품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또 한 시즌이 지나가고 11월 초에는 자전거 출퇴근을 마무리하고 실내자전거로 전환하면서 이번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시즌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반 년 늦게 제품 제작이 완료되어 배송을 시작했고 실외 시즌을 접기 직전에 실제 물건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현실

위에서 스마트폰의 자원을 끌어 쓰는 바이크컴퓨터를 설명했지만 사실은 좀 회의적인 생각도 있었습니다. 현대의 바이크컴퓨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고 또 생각보다 더 많은 기술의 집합입니다. 가령 하드웨어를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스마트폰을 끌어들인 이상 하드웨어의 펌웨어, 아이폰 소프트웨어, 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 웹 서비스 등 바이크컴퓨터 하나를 위해 신경써야 할 분야가 너무 많았습니다. 또 스트라바처럼 GPS센서에만 의존한 고도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자체 지리정보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간신히 하드웨어와 펌웨어 개발력을 가진 조그만 회사가 진입하기에는 그리 만만하지 않은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동작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예상하고 기대치를 낮추던 중이었습니다. 일단 벽돌이 아닌 물건이 배달된 것 만으로도 한 75%정도는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안 남은 자전거 출근길에 트림원 바이크컴퓨터를 거치하고 출발했습니다. 물론 이 기계를 조금도 신뢰할 수 없었으므로 가민 엣지 역시 주머니에 넣어뒀습니다. 리모트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주머니에 있던 가민 엣지도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짧은 남은 시즌 기간 동안 트림원을 달고는 1000킬로미터도 채 달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론은 기 기계를 단독 사용해 내년 브레베 시즌을 시작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동작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이 기계는 위에서 이야기한 '센서 몇 가지가 달린 스마트폰 모니터'라는 컨셉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이 아이폰이기나 한 것처럼 지금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제조사는 스마트폰과 연동해 장시간 배터리가 유지될 거라고 주장했지만 브롬톤으로 고작 100킬로미터를 달린 날 집에 돌아와보니 가민 엣지는 65%, 트림원은 38%의 배터리 용량이 남아있다고 표시됐습니다. 이 추세라면 가민은 가장 짧은 브레베를 감당해낼 수 있겠지만 트림원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배터리가 아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제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가령 스마트폰과 어떤 이유로는 연결이 끊겨 트림원 기계에 달린 센서들을 직접 사용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과 연결은 어떻게, 왜, 언제부터 끊어졌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기계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모드를 전환한 모양이고 그냥 조용히 배터리를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눈치채기 전까지 제게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트림원에 문제가 생기면 그냥 주머니에서 가민을 꺼내 바꿔 달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30만원이나 낸 기계의 동작을 신뢰할 수 없어 가민을 항상 백업으로 들고다니는 시나리오를 상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알루미늄으로 된 껍데기는 깔끔하고 예쁩니다만 이걸 들고 연말 페스티브500 라이딩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깔끔은 표면은 영하 10도 미만의 기온을 기기 안쪽으로 원활하게 전달해 배터리 안의 화학반응을 가민 엣지보다도 효과적으로 멈출 거라고 예상합니다. 또 가민 마운트와 호환되지만 평평한 뒷면 덕분에 기기를 정확하게 조준해서 거치하기 어렵습니다. 아이폰 기준으로 소프트웨어는 동작하기는 하지만 특유의 투박하고 아이폰 사용자들의 감을 따라오지 못하는 인터페이스를 자랑하며 가민 특유의 '막무가내 업데이트'도 여전합니다. 난 지금 스타트 누르고 출발해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펌웨어 업데이트 하는 건 분명 가민으로부터 배워왔을 겁니다. 스마트폰 없이는 센서 하나 추가할 수 없고 인도어 사이클링에 사용할 수도 없고 또 스마트폰 없이는 밝기를 조절할 수 조차 없습니다. 모니터 컨셉은 훌륭하지만 이렇게까지 컨셉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결론

이 기계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여전히 괜찮은 컨셉입니다만 이 기계에 30만원과 1년을 투자해서 얻은 결론은 우리들이 가민 엣지 바이크컴퓨터를 사용하며 가민을 욕하는 것과 달리 이 비즈니스는 생각보다 복잡한 기술적 디테일을 요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디테일을 달성하려면 시간이나 돈이나 인력 중 적어도 둘 이상은 갖춰야 하고요. 하지만 트림원의 제조사가 이들 중 적어도 하나를 갖추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쿨하게 스마트폰 앱을 단독으로 사용할 때 고도정보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말로부터는 자체 지리정보를 운용하는 스트라바가, 고작 100킬로미터 주행에 70% 넘는 배터리를 소모해버리는 점으로부터는 이제 전용 외장배터리를 지원하는 가민 엣지가, 폰과 연결이 끊기자 그대로 사라져버린 코스 내비게이션은 스마트폰의 음성안내 기능이 떠올랐습니다. 제대로 동작하는 파워미터가 드물다는 점 같은 건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라이딩에 크리티컬하지도 않은 것 같아서요. 그리도 다시 한 번 이 비즈니스가 가민 엣지가 구린 것 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기계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여전히 괜찮은 컨셉입니다. 하지만 그건 소프트웨어가 훨씬 더 정교해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전에는 이 기계는 추천할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기계에 정교한 소프트웨어가 들어갈 때까지 개발자들이 버틸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습니다.

추가.

저녁에 즈위프트 타면서 켜놔봤는데 1시간 내내 케이던스와 심박을 제대로 표시했지만 (파워미터 화면은 내가 안 만들어놔서 못 봄) 나중에 로그를 뽑아보니 처음 6분 23초어치만 남아있었습니다. 오동작은 둘째 치고 그냥 동작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킥스타터를 통한 제품이 아니었다면 좀더 많이 열받아 내 돈을 돌려받기 위해 강력하게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 지원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구입하지 마세요. (다행히도 딱히 구입할 방법은 없는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