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인피니티의 실패는 당연하다

최근 엑시인피니티의 인플레이션을 보며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때는 P2E의 선두주자였던 이 게임이 벗어날 수 없는 인플레이션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누군가는 P2E모델이 근본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유틸리티토큰과 거버넌스토큰으로 대표되는 경제시스템의 구조적인 실패하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몇몇 논의들을 지켜보다가 P2W에 뇌가 절여진 게임디자이너 입장에서 이 상황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처럼 느껴져 이를 기록해 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엑시인피니티의 사례를 토크노믹스의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기에 갚어치 없는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P2W 게임에는 크게 두 가지 재화가 있습니다. 흔히 골드와 다이아로 대표됩니다. 골드는 주로 인게임에서 플레이에 대한 보상으로 얻으며 유틸리티토큰의 성격을 띱니다. 다이아는 주로 게임 밖에서 법정화폐를 지불해서 얻습니다. 다이아 역시 인게임에서 유틸리티의 속성을 띠지만 게임 내에서 사용 목적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골드는 고객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여러 동작에 사용되고 다이아는 P2W를 위한 성장으로 대표되는 행동에 주로 사용됩니다.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다이아는 다시 유료 다이아와 무료 다이아로 구분되고 골드도 입장권과 입장횟수증가 등 서로 다른 형태로 유통되지만 여기서는 골드와 다이아 그 자체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크립토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두 가지 재화를 채용한 경우가 많습니다. 유틸리티토큰과 거버넌스토큰입니다. 유틸리티토큰은 전통적인 P2W 게임의 골드에 비교됩니다. 거버넌스토큰은 종종 다이아에 비교되곤 하지만 이는 잘못됐습니다. 전통적인 게임에는 거버넌스토큰에 대응하는 재화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게임 입장에서 해석하면 두 가지 유틸리티 토큰이 있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두 토큰은 서로의 역할을 구분할 수가 없는데 골드는 게임 플레이와 법정화폐로 다이아를 구입할 때 보너스로 얹어주는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크립토 게임 관점에서 이 두 가지 토큰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둘 다 블록체인을 통해 게임 바깥에 노출되어 있어 둘 다 똑같이 법정화폐를 지불해 구입한 다음 인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립토 게임에 두 가지 토큰이 있는 것과 전통적인 P2W 게임에 두 가지 핵심 재화가 있는 모습은 서로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르며 이들 둘을 대응시켜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제 엑시인티니티 사례를 생각해봅시다. 엑시인피니티 역시 유틸리티토큰과 거버넌스토큰이 있는데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인게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유틸리티토큰 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이 토큰은 게임 밖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게임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소위 하수구를 곳곳에 마련합니다. 온갖 자잘한 행동에 골드를 조금씩 소모하고 다이아를 통한 P2W 메커닉 동작에도 골드를 요구합니다. 정교하게 설계한 하수구는 눈에 띄지 않지만 항상 골드 부족에 시달리게 만들고 이를 이벤트 운영이나 유료 상품을 통해 극복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도 합니다. 엑시인피니티에서는 유틸리티토큰 한 종류만 인게임에 관여하므로 간단히 치환해 게임에 골드밖에 없고 이 골드를 게임 바깥에서 사고팔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엑시인피니티는 게임 내에 골드 하수구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게임 경제를 설계하는 관점에서 엑시인피니티의 구조는 무식해서 용감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상점에서 골드를 파는데 인게임에 골드 하수구가 없으니 인플레이션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다만 한동안 골드인플레이션 대신 P2E가 동작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신규 고객이 유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은 초기에 엑시를 구입하지 않으면 게임에 아예 진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엑시를 구입하기 위한 유틸리티토큰이 필요하고 이를 구입하는 방법은 기존에 토큰을 보유한 고객들로부터 구입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플레이어 수가 늘어나면 플레이어 개개인이 보유한 유틸리티토큰이 희석되고 종말은 약간 더 멀어집니다. 만약 신규 고객이 P2E를 염두해 두고 게임에 지속적으로 유입된다면 종말은 조금씩 멀어집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골드 하수구가 없는 이상 종말은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게임은 신규 고객 유입이 둔화되는 순간 신규 고객에게 골드가 희석되는 동작이 사라지며 순식간에 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됩니다. 한번 인플레이션에 빠지면 유틸리티토큰의 가치가 떨어지며 P2E 메커닉으로부터 얻는 수익이 플레이어들이 투입하는 노동소득보다 낮아집니다. 한 번 이 지점을 지나면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P2E 메커닉이 깨진 게임은 매력을 상실하고 신규 고객 유입의 동력마저도 잃어버립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전통적인 골드 하수구와 정교하게 설계된 다중 재화를 통한 완만한 가치유지정책 뿐입니다.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토큰을 스테이킹하는 아이디어를 봤는데 이 역시 해결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제는 게임 내에서 골드가 소모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스테이킹은 골드를 소모시키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종말의 시점을 늦추는 역할을 하지만 스테이킹이 끝날 때 스테이킹 보상을 집행해야 하므로 좀 더 나중에 좀 더 강한 종말을 불러올 뿐입니다.

이 사례로부터 배울 점은 전통적인 온라인 게임들이 20년 전부터 고민하던 골드 하수구 문제가 크립토 게임에 발생해 마치 새로운 문제인 것처럼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실상은 20년 전에 일어난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골드 하수구를 만들면 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토큰을 소각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