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진행으로부터 우리가 잃은 것

자동진행으로부터 우리가 잃은 것

오래 전 어쎄신 크리드 오딧세이를 플레이할 때 인터페이스에 목적지를 표시하지 않는 옵션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픈월드 게임을 좋아하는데 오픈월드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 특별히 급한 상황을 제외하곤 웬만해선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순간이동을 하면 짧은 로딩만 기다리면 바로 플레이를 계속 할 수 있지만 몰입을 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지만 굳이 이동수단을 타고 털털거리며 이 미국 어딘가의 들판을 달리곤 했습니다. 아. 이건 올해 뒤늦게 플레이한 파크라이 5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쎄신 크리드에서 목적지를 끄면 대사에 좀 더 집중하게 되고 세계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호기롭게 옵션을 끄고 두 시간 동안 이를 꽉 물고 플레이 하다가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했지만 옵션을 원래대로 돌려놨습니다. 나는 게임 세계에 최대한 몰입하기를 원하지만 물리적인 한계로 모니터 밖에 있고 게임 속에 있는 플레이어캐릭터와는 달리 게임 속 세계를 인지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게임 밖의 나는 감각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인터페이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며칠 전 리니지W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슬슬 글 쓸 거리가 바닥나고 있었는데 새로 게임을 시작하면 이야깃거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멋진 컷씬이 끝나고 처음으로 내게 조작이 넘어왔을 때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사실 게임의 문법을 통해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게임은 볼빅이 어디있는지 내게 직접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이동을 시작해야 할 방향을 향해 서 있었고 아이소메트릭 뷰를 채용한 게임들의 가장 흔한 진행방향에 입구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플레이는 방금 전 본 컷씬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내가 이동할 방향을 게임이 나에게 충분히 알려줬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자동퀘스트를 제공하는 게임에서 이런 의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크린샷을 찍기 직전에 저는 본능적으로 왼쪽 위에 나타난 퀘스트가이드를 터치하려고 했으니까요. 플레이어캐릭터를 직접 움직일 생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분명히 왼쪽 하단에 V패드를 함께 표시했고 내게 선택권을 주고 있었습니다. 퀘스트가이드를 터치하거나 아니면 V패드를 조작하거나. 게임 속에서 내가 할일은 명확합니다. 나는 볼빅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게임 바깥에서 폰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고 인게임에 있는 내 분신에 비해 한참이나 제한된 감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 세상의 방위를 모르고 이 성의 구조를 모르며 방금 일어난 사건의 배경과 전말을 아직 모릅니다. 그런 나에게 방금 대화한 사람에게 이동하라는 목표는 조금 멀게 느껴졌습니다.

퀘스트를 내가 직접 플레이하는 게임은 플레이어가 게임 밖에 있어 감각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필드에서 이동할 수 있는 곳과 이동할 수 없는 곳은 시각적으로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다른 인터페이스를 통해 내가 이동할 마을 방향을 알려주고 마을 안에 들어가면 내게 할 말이 있는 NPC가 머리 위에 아이콘을 띄우고 있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플레이어들의 게임에 대한 집중력과 몰입은 점점 더 낮아져 갔고 이에 맞춰 이동할 경로에 붉은 카펫을 깔아 넛지하거나 그래도 의사를 전달하기 어렵다면 대놓고 바닥에 반짝이는 화살표를 그려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동퀘스트가 등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플레이어의 감각이 제한되어 있다는 고려를 훨씬 덜 해도 됐습니다. 설명이 명확하지 않아도, 또 좀더 은유적이어도 괜찮았습니다. 플레이어가 이 구조물을 처음 보겠지만 구조물 내부의 구체적인 위치를 언급하기만 한 채로 퀘스트를 진행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플레이어는 더이상 이런 정보를 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순간에 사실 저는 볼빅을 따라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멈추고 바라본 화면은 더이상 내가 게임 밖에 있고 감각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런 요소들로부터 자동진행으로부터 우리가 게임 속에서 제한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감각과 감각을 보조하는 수단 대신 인게임에서 내 행동을 대신해주는 새로운 보조 장치를 통해 게임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설계가 필요할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