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퇴근의 효과

정시퇴근의 효과

작년까지 지난 몇 년 동안은 꽤 오랜 시간 일했습니다. 주 당 최대한 일할 시간 제한이 없던 시대에는 정확히 얼마나 일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매주 업데이트 하는 날은 그 전날부터 적어도 24시간 연속으로 일하며 업데이트를 하고 서비스를 재시작해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확인할 때까지 대기했습니다. 이런 패턴을 고려해 지금의 주 당 최대 근무시간을 기준으로 추측해보면 한달의 약 절반 정도 일하면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월 최대 근무시간에 제한이 생기고 업무시간을 정확히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비해서는 상황이 개선됐습니다. 아주 작은 이유만 있어도 편안하게 소집할 수 있던 주말출근이나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한 밤 10시까지 야근 같은 정책은 더이상 실행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 당 최대 근무시간에 제한이 있어도 여전히 이 최대 시간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최대 시간에 가깝게 일하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얼굴에 표정이 없었습니다. 표정을 지어야만 할 때 온 힘을 끌어올려 얼굴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여러 해를 보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일이 끝나도 일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 동안 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있으나 출퇴근을 하나 집에 있으나 머릿속은 대략 비슷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운동이든 공부든 글쓰기든 뭔가를 해 볼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주말에 날씨도 좋고 바람도 선선해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입니다. 이런 날 동네 고개 여러 개를 묶어 올라가면 딱 신 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신나는 단계까지 도달하는데 필요한, 사실은 평소같으면 무의식적으로 실행했을 다음 단계들 하나하나가 할 일 목록이 되어 나타납니다. 튜브에 바람도 넣어야 하고 오일링도 해야 하고 가민 달고 전조등 후미등 달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변속기 배터리는 있나 확인도 해야 하고 자전거를 들고 나가 엘리베이터도 타야 하고 또 길 가는 자동차가 위협운전 할 것 같고 고글은 주간 고글을 써야 하나 야간 고글을 써야 하나 망설여지고 물통에 물도 채워야 하고 아니 가다가 배고프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듭니다. 이 모든 생각 끝에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집 안에 앉아있다가 몇 시간이 지난 다음 후회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자전거 타기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로그에 뭐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에서 손가락까지 글이 전달되질 않았습니다. 한번은 자세를 잡고 키보드 앞에 앉았지만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들이 손가락에 도착하질 않았습니다. 빈 페이지를 지켜보다가 그냥 닫았습니다.

비슷한 증상을 겪는 분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습니다. 그냥 거의 모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 상태가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남들도 그렇겠거니 했습니다. 다만 인터넷에는 온통 열심히, 부지런히 갓생을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올 초부터 약 반 년에 걸쳐 정시퇴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완전히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략 평일의 95%정도는 초과근무를 하지 않고 퇴근했습니다. 이전 직장에서는 이게 완전히 불가능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들의 지속 가능한 퍼포먼스를 고려하지 않은 목표가 강한 압력으로 내려오면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개선하는 방법은 퇴사 뿐이었는데 그 후로 초과근무를 하지 않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비슷했습니다. 또 똑같이 무슨 일을 시작하려다가도 멍하니 그 일을 시작하는데 따른 온갖 장애물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떠올린 다음 그 목록을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수행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한 다음 이내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헌데 한 반 년 정도 지나고 나니 긴 목록으로 나타나던 장애물들이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 목록은 하나하나를 의식적으로 수행할 복잡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물통에 물 좀 채우고 한 30분 충전하고 한 1분쯤 바람 넣으면 그만인 일들일 뿐이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7월 초부터 그동안 재발해 고통받던 글을 못 쓰는 병을 치료해볼 생각도 들었습니다. 분명 정성을 들여서 뭘 쓰려고 하면 또다시 뭘 쓰기 위해 거쳐야 할 많은 단계들이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할 목록으로 나타나 날 방해할테니 이번에는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할 생각을 했습니다. 글은 한번에 쭉 끝까지 써 내려가고 분량과 수량을 우선하며 한 번 써놓은 글은 오타를 수정하는 수준으로만 고치기로 원칙을 세워 놓고 지난 7월부터 실험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쓰는 거지만 이를 하루에 한 번씩 트위터를 통해 공개하기로 했는데 몇 달에 걸쳐 야근을 멈추기 전까지는 이렇게 마음먹기도 어렵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실행하기도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번에는 두어 달 정도 계속해서 분량과 수량에 초점을 맞춰 뭐든 써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사실 두 달 동안 공개한 글들은 수량에 초점을 맞춘 만큼 글 하나하나는 좀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머릿속이 좀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시퇴근의 효과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