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를 강요받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오늘은 좀 어두컴컴한 이야기를 해 볼 작정입니다. 저는 이 업계에서 게임디자인을 해서 돈을 받아 먹고 삽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게임디자인은 개발팀 내에서, 또는 고객들에게 거의 존중 받지 못합니다. 때때로 높은 분들이 속도 없이 ‘허허 기획이 가장 중요하죠’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회피하는 일들이 당연하게 우리에게 오곤 합니다. 우리들이 그 업무에 전문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흔히 노가다라고 하는 자동화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리에게 옵니다. 프로그래머들이 바빠 자동화 해줄 수 없다면 우리의 노동시간을 태워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코딩이라는 마법을 배워 노가다를 좀 줄이기도 하지만 개발팀 내에서 누구도 이 업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작 파이프라인에 편입되지도 못하고 그저 개인의 업무가 조금 빨라지는데서 그치곤 합니다. 흔히 연구개발이 필요한 순간에 기획을 변경하게 됩니다. 시나리오가 이런 일을 가장 자주 겪습니다. 설정을 바꾸면 되는데 구현을 왜 바꿔야 하는지 답할 수 없다면 바뀌는 것은 설정입니다. 업적 조건을 변경하면 되는데 왜 새로운 업적을 구현해야 할까요. 레벨을 열어 모든 몬스터들의 프로퍼티를 수정하면 되는데 왜 개발이 필요한가요. 대표 해상도 몇 종류에 맞춰 튜토리얼을 여러 벌 만들면 되는데 왜 좌표계산을 별도로 해야 할까요. 기계가 밸리데이팅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다면 사람이 밸리데이팅 하면 됩니다. 데이터를 기획이 넣었으니 당연히 기획이 해야죠.

이런 일 중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복제입니다. 다른 게임을 복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양산형 게임이라고 욕 먹고 싶지 않습니다. 실은 어떻게 만들어야 회사의 기대치를 충족하면서도 양산형을 벗어날 수 있을지 잘 모릅니다. 이를 알아내려면 연구해야 하고 연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합니다. 마일스톤 마감까지 6주밖에 안 남았습니다. 앞으로 1주 안에 기획서가 못 나가면 이번 마감 안에 못 만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이번 마일스톤에 이 기능들이 못 나가면 맨 먼저 추긍 받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기획서가 늦게 나와서 못했다고 말하면 쉽게 이해 받습니다. 또 연구개발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모두가 시간 사용을 두려워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이미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매 마일스톤마다 예측 가능하고 유효한 결과를 내야만 합니다. 연구개발은 기간마다 유효한 결과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업계에는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직접적으로 복제하라는 주문을 받기도 하는데 대략 이런 식입니다. 오딘의 버프 표시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따라하라든지, 리니지의 아이템 컬렉션 시스템을 복제하고 게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동일하게 만들라든지, 리니지2M의 아이템 사용 조작계를 복제하라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주문을 직접 받지 않아도 이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기획서를 작성할 방법이요. 다행히 우리가 만드는 게임은 근본적으로 다른 양산형 게임과 비슷합니다. 양산형 게임을 만들면 여러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미래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상할 수 없는 일은 모두가 싫어하고요. 양산형은 다른 게임의 구성을 복제해도 큰 무리 없이 동작합니다. 또 어느 순간 여러 게임으로부터 복제한 시스템들에 익숙해져 개발에 속도가 붙습니다. 자리에 앉아 리퍼런스 없이도 주요 기획을 찍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속도가 붙으면 모두가 기뻐합니다. 기획서가 빨리 나오면 모든 협업부서가 기뻐합니다. 리드그룹도 기뻐합니다. 이해하기 쉽고 또 더 높은 분들에게 설명하기도 쉽습니다. 다른 게임은 이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하느냐고 딴지 걸릴 일도 없습니다. 그냥 ‘리니지W도 그렇게 했어요’라고 이야기하면 설명이 잘못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주니어님들께 이렇게 일해달라고 주문하면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스스로도 이런 주문에 다쳐 한참을 그다지 유쾌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주니어님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이러려고 이 업계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 내에 일을 끝마칠 방법은 거의 이것 뿐이고 바쁜 팀에서는 거의 항상 그랬습니다. 직접 지시 받지 않았지만 방법이 이것 뿐일 때 특히 더 많이 다치는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심하게 메신저 프로필 아이콘을 복사기로 바꾸는 것 정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제 의지로 복제를 직접 지기하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직접 지시 받으면 덜 다치지 않을까 하고요. 스스로 복제하기로 결정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지시했으니 이 상황 속에서 블레임할 뚜렷한 사람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멘탈을 덜 깨며 살아남으려면 지시 받은 업무에 해당하는 메커닉이 게임 전체에 걸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실은 복제를 반복하다 멘탈이 깨지면 이런 의지도 안 생기기 마련입니다. 지시할 때 프로젝트 전체에서 이 복제 행위가 가지는 여러 측면을 설명하려고 노력해 보고 있습니다. 이 복제된 시스템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모바일 리니지 시리즈의 도감 시스템을 복제하더라도 왜 이 시스템이 있는지, 이게 게임 전체에 어떤 위상을 가지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야 하고 스스로 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개개인들이 이를 복제하면서도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이 복제행위가 필요한 정치적인 측면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마일스톤 시작할 때 높은 분들이 스폰서에게 한 구두약속 같은 것들이요. 이들은 특히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외부상황입니다. 이런 정보를 알아야 업적 목록과 도감의 능력치 목록을 복제하더라도 멘탈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게임디자이너로써 살아남을 수 있고요.

개인 입장에서는 복제하더라도 결과에 내 의지를 욱여넣습니다. 내 스스로도 여러 게임의 고객이기에 이런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생각한 요구사항들이 있습니다. 아직 생각할 여유와 고칠 의지가 남아 있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요구사항을 복제 결과에 밀어 넣습니다. 아마 이 프로젝트만 놓고 보면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거치며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여러 프로젝트에 걸친 이 발전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업계를 바꿀 수 있을지는 여전한 고민거리입니다. 우리가 회사의 요구를 충족하면서도 복제하지 않고 또 우리 스스로 멘탈을 다치지 않고 개발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닥쳐온 상황에 멘탈이 덜 깨지며 버티는 방법을 고민해 왔습니다. 이제 그 다음을 고민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