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받기의 탄생

모두받기의 탄생

생각 없이 만들면 안되지만 종종 생각 없이 만들다 보면 이상하게 꼬인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부터 꼬였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당장 눈앞에 생긴 문제를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정말로 이상하게 꼬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성장하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장르를 개발하면서 여러 성장 요소를 게임 곳곳에 나눠 배치했습니다. 이전에는 성장 요소가 아니었던 기능도 현대에는 성장 요소가 되었습니다. 가령 게임에 업적이 처음 나타나던 시대에는 정말 말 그대로 업적이었습니다. 게임에서 달성한 행동에 대한 명예 보상. 업적을 통해 유저의 행동을 유도했습니다. 고약한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플레이 시간이 길어집니다. 업적을 잘 만들면 무리해서 설계하지 않은 반복 플레이가 일어납니다. 이 시간만큼 게임 수명이 길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며 업적은 내가 게임 상에서 의식적으로 수행하지도 않은 온갖 상황에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몇 발자국 걸어가 적을 한 대 때리기만 해도 몇 가지 업적이 달성 됩니다. 어느 순간 업적은 최상위 업적을 제외하고는 내 행동과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아무 때나 나타나는 스팸에 가까워졌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업적에 반응하지 않게 됐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업적이 더 이상 유저가 인식하는 행동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업적에 반응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업적에 보상을 주면 업적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수행할 겁니다. 업적을 달성할 때마다 자잘한 인게임 보상을 지급하기 시작합니다. 기본 재화나 성장 재료를 줍니다. 이제 성장 구간을 설계하며 업적으로부터 성장 크리티컬한 재료를 얻게 만들기에 이릅니다. 여기에 업적을 더 중요하게 만들어 업적에 반응하게 만들기로 합니다. 업적에 인게임 아이템 뿐 아니라 영구적인 스테이터스 증가를 붙여 업적에 집중하게 만들기로 합니다.

유저들은 영구적인 스테이터스 증가에 강하게 반응합니다. 이번에는 영구적인 스테이터스 증가를 게임 곳곳에 분산 시켜 여러 시스템이 골고루 사용하도록 합니다. 업적에도 넣고 아이템 컬렉션에도 넣습니다. 업적은 같은 업적을 여러 번 달성함에 따라 레벨을 올리게 하고 레벨에 따라 더 높은 스테이터스를 받게 만듭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게임 전체에 걸쳐 스테이터스가 잘게 나뉘어 배치됩니다. 보상은 게임의 각 기능에 가능한 잘게 나뉘어 있을 수록 좋습니다. 유저가 게임의 온갖 사사로운 메뉴 구석구석까지 탐험해 가며 보상을 받습니다. 지표에 인게임의 온갖 메뉴가 빠짐없이 나타납니다.

피로해집니다. 합치면 분명 보잘것없는 보상이 아니지만 이들을 수령하기 위해 불규칙하게 만들어진 메뉴 구석구석을 터치하고 다녀야 합니다. 빨간점을 따라가 보상을 먹기만 해도 10분이 훌쩍 지납니다. 아직 오늘의 숙제를 시작하지도 못했는데도요. 비슷하게 생긴 메뉴아이템 여러 개를 반복해서 터치하며 보상을 먹다가 누군가의 뚜껑이 열리고 맙니다. 게시판에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글이 올라옵니다. 여전히 지표는 모두가 기뻐하는 모양이므로 대응 우선순위가 낮았지만 같은 의견이 늘어나면서 어떻게든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모두받기가 없었다면 일일히 눌렀어야 할 보상 수령 버튼들.
모두받기 버튼 덕분에 메뉴 여섯 개를 하나하나 누를 필요가 없다.
모두받기 덕분에 한번에 획득한 여러 스테이터스.

이번에도 눈앞에 보이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유저들이 불편하다고 말한 것은 비슷한 메뉴아이템을 반복해서 터치하며 보상을 받는 행동입니다. 이 과정을 한번에 처리하는 모두 받기 기능을 넣기로 합니다. 이제 주요 컨텐츠를 열어 모두 받기 버튼을 한 번씩 터치하면 됩니다. 10분이 1분으로 줄어듭니다. 이제 각 메뉴아이템마다 작성한 텍스트와 아트웍은 영원히 볼 일이 없어졌습니다. 지표 상 메뉴아이템 하위는 이제 누구도 접근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텍스트와 아트웍과 각 메뉴아이템마다 스테이터스를 분산시킨 정교함은 이제 큰 의미가 없게 됐습니다.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로 적었지만 실은 해피엔딩입니다. 여전히 유저들은 게임의 주요 컨텐츠에 방문에 잘게 나뉜 스테이터스 보상을 받습니다. 지표 상 여전히 주요 컨텐츠 별 리텐션이 유지됩니다. 다양한 컨텐츠가 플레이 되며 다양한 성장재료가 유통되어 사업이 개입할 여지가 여전히 많으면서도 모두 받기 덕분에 복잡도가 어느 정도 통제됩니다. 다만 모두 받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텍스트와 아트웍과 스테이터스 분배는 필요합니다. 해피엔딩 속에서 누군가는 썩 기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