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탯을 직접 찍지 않는 이유

오래된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캐릭터 이름을 정하자마자 초기 스탯을 설정해야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게임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또 여러 숫자들이 게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르는데 당장 숫자부터 정하라는 요구를 받아 당황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게임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런 디자인은 초반에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중후반에 으르러 작은 스탯 차이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때 문제를 인식하면 문제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합니다.

게임에 따라 레벨업 때마다 스탯을 직접 지정하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클래스 설계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스탯을 찍으면 소위 망캐가 되기도 합니다. 스탯 리셋이 없으면 캐릭터를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았고 게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돌이키기 어려운 선택을 요구하는 건 아주 부당한 경험입니다. 사실은 이런 숫자 선택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 지식을 게임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디자인은 의도와 아주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의도는 같은 클래스라도 스탯에 따라 다른 플레이 스타일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스탯에 따른 플레이 스타일들이 게임의 여러 시점에 따라 비슷한 효율을 내도록 설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효율이 높은 스테이터스 조합을 제외한 나머지는 망캐가 되고 맙니다. 싱글플레이 게임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잘못된 선택을 돌파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의도한 플레이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멀티플레이 게임에서는 이런 탐색 활동이 성장 경쟁에서 밀려나는 행동입니다.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같은 비용을 들여 효율 우선의 선택을 한 상대와 PvP를 할 때 탐색적 플레이가 부정되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강한 경쟁을 요구하는 멀티플레이 장르에는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입니다.

이제 레벨업 할 때 스탯이 자동으로 증가합니다. 클래스 디자인 의도에 따라 레벨이 오르는데 맞춰 캐릭터가 동작합니다. 클래스 디자인 의도와 다른 망캐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디자이너는 비슷한 시점에 서로 다른 클래스 간에 비슷한 효율을 달성하도록 디자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전처럼 서로 다른 스탯 단의 효율을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어 디자인 난이도가 낮아집니다. 유저 입장에서는 망캐를 만들 여지가 없어 자신 있게 레벨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게임을 파악한 다음 돌이킬 수 있는 방법으로 스탯을 조절할 수 있기도 합니다. 스탯을 잘못 찍었다면 비용을 내고 스탯을 리셋 할 수 있게 하기도 하는데 캐릭터를 새로 만드는 것 보다는 관대하지만 새로운 시도에 비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지향하는 디자인은 아닙니다. 단지 실수를 바로잡는 수준의 의미만 있습니다.

리니지 라이크 게임 공통으로는 아이템 컬렉션을 통해 스탯을 올립니다. 컬랙션에서 원하는 스탯을 찾아 이에 해당하는 아이템을 파밍하는 플레이는 유저를 게임에 익숙하게 만들고 스탯 자체를 목표로 설정하게 만들어 실수 여지를 줄입니다. 특정 스탯을 목표로 삼는다면 장비성장으로 스탯을 올리기도 합니다. 스탯 종류에 따라 전투에 직접 관여하는 스탯은 컬렉션에서 분리해 장비성장에 배치하고 장비를 성장시키는 맥락을 통해 전투 행동에 관여하는 스탯을 올리도록 자연스럽게 가이드합니다.

현대에는 레벨업 할 때 더이상 스탯 설정을 직접 요구하지 않는데 유저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도록 방치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는 현대 관점에서 너무 낡은 메커닉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스탯을 선택하게 하기보다는 스탯 자체를 목표로 삼도록 성장 방식을 변경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