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그동안 사람이 그린 그림으로부터 학습한 기계가 생성한 그림이 사람의 그림에 근접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쉽게 산업혁명 시대의 방직 기계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보다 가까이는 사람의 번역을 통해 학습한 기계가 초벌 번역을 대신하거나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하거나 더 이상 지하철에 탑승하지 않는 기관사가 떠오릅니다. 이들은 150년 전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주변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문득 지난 세월이 흐르며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게임디자이너 혹은 좀 더 전통적으로는 게임기획자가 문서를 쓰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고 이제 뭘 해야 할지도 생각해 볼 작정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시각화 도구가 발달했습니다. 이를 통해 메커닉을 시각화하는 업무가 원화가로부터 기획자에게 이동했습니다. 그 전에는 디렉터와 원화가가 직접 이야기하며 개발 초기 단계에 메커닉을 시각화했습니다. 원화가는 자신이 이해한 메커닉을 확장해 게임디자인을 정립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드로잉 도구가 발달해 네모와 화살표를 연결하는 수준에서 졸라맨과 화살표로 만든 드로잉을 기획자가 쉽게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군가는 파워포인트로, 누군가는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만 원화가는 게임디자인으로부터 거리를 둔 그림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검색이 강력해졌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업무 방법이 변했습니다. 오랫동안 기획자들은 짤방을 정리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를 키워드 기반으로 쌓아 놓고 있었습니다. 이미지 검색이 강력해지며 더 이상 짤방을 정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머릿속 이미지와 비슷한 이미지를 키워드 기반으로 검색해 찾아낼 수 있었고 내가 직접 본 이미지를 정리한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미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상용 엔진의 개발 환경이 편리해졌습니다. 이전 시대에는 그림을 손으로 그리거나 포저로 만들어 놓고 따라 그리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언리얼 에디터에서 메커닉이 적용된 장면을 만든 다음 스크린샷이나 영상을 찍어 문서에 첨부하기 시작했고 이전에 비해 의사 전달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습니다.

다른 사례로는 워드로 문서를 작성해 형상관리도구에 직접 커밋하던 시대에서 원노트나 위키를 사용해 한 문서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작성하며 ‘취합’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됐고 또 직접 계산해서 곡선을 만드는 공식을 유도하는 대신 엑셀에서 유도하게 됐습니다. 게임 전체에서 참고하는 테이블을 노션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놓고 여러 문서에서 필터만 바꿔 가며 첨부해 테이블 수정을 모든 문서에 한 번에 반영할 수 있게 됐고 또 피그마 같은 실제 디자인 도출에 목적을 둔 도구 대신 발사믹 같은 와이어프레임 전문 도구로 인터페이스 초안 작성 시간을 단축했습니다.

이런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전통적인 기획자 입장에서 이미지 검색에서 더 나아가 키워드 기반으로 생성한 그림이 상당히 쓸모 있습니다. 레벨디자인 문서에 첨부하던 다른 영화나 게임의 스크린샷,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미지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메시지를 무시하던 그림들 대신 내가 제시한 키워드 기반으로 직접 생성한 그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제시한 키워드에 따라 이전에 비해 더 나은 그림을 만들어 의사소통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실험을 반복해 보니 조만간 회사에 이 도구를 사 달라고 기안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 기계들이 내 일을 대신할 거란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 직업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일은 사람들이 원하는 감정을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공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곧 기계가 직접 사람들이 원하는 감정을 만들어 주게 될 겁니다. 그 순간 이 직업은 사라질 겁니다. 다만 직업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 향상된 생산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내 직업의 수명이 끝나는 순간에 기계와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관점에 매몰되면 무기력 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의 도움을 받아 생산성을 올려야 이 세계에서 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업무 방식이 바뀌는 과정에 지금 뛰어들어야 합니다.